[수필 기고] '질마재의 바람이 부르는 이름들'
2026.04.21 (화)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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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기고] '질마재의 바람이 부르는 이름들'

이동준 작가
[고창뉴스]설날이 머지않았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문득 곰삭은 소금기 냄새가 섞여 드는 것만 같다. 그 바람은 내 유년의 탯줄이 묻힌 곳, 미당(未堂)의 '질마재 신화'가 태동한 전라북도 고창 선운리 질마재 마을에서 불어온 것이다.

질마재, 말의 등에 얹는 '길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그 고갯마루의 이름은 내게 있어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설화(說話)이자 우주였다. 내가 나고 자란 그곳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의 신들과 이웃하며 살았던 묘한 동네다.

서해의 밀물과 썰물이 실어 나르는 갯벌의 짠 내와 선운산 산사의 은은한 향이 공존하는 그곳에서, 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을의 공기는 평소보다 더 진하고 숭고하게 일렁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바람의 끝에 매달려 오는 옛사람들의 이름이 더욱 간절해지며, 내 안의 기억들은 다시금 선명한 색채로 되살아난다.
필자가 유년기 때 부모님이 운영했던 질마재 방앗간

어린 시절, 설을 며칠 앞둔 질마재에 눈이 내리면 온 마을은 그대로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가 되었다. 미당 시인이 "신선이 살다 간 자리"라 읊조렸던 그 산등성이마다 하얀 소금이 뿌려진 듯 눈이 쌓였다.

서해의 습기를 머금은 눈은 소리 없이 내려앉아 지붕의 낡은 이엉을 덮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가지마다 눈꽃을 피워냈다. 그 눈은 단순히 차가운 결정체가 아니라, 하늘이 질마재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령한 선물 같았다. 아이들은 눈 덮인 마당을 뛰어다니며 신들의 발자국을 찾았고, 어른들은 그 하얀 풍경 속에서 내년 농사의 풍요를 점치곤 했다.

그때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설빔을 짓기 위해 밤새 바느질하던 어머니의 그림자는 호롱불 아래서 벽면 가득 커다랗게 비쳤고, 그 모습은 마치 마을을 수호하는 거대한 지신(地神)처럼 든든했다. 서걱서걱 가위질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한숨과 소망이 옷감 사이에 촘촘히 박히던 밤들. 그 곁에서 나는 어머니의 바늘귀에 실을 꿰어주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갑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마당 한편에서 가래떡을 뽑기 위해 쌀을 씻던 할머니의 손길에는 질마재 바람이 묻어 있었다. "애야, 저 성황재 도깨비들도 설 쇠러 내려오것구나. 그러니 떡국물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마라. 우리랑 같이 명절을 맞아야 안 허냐"

할머니의 그 농담 섞인 한마디는 어린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 명절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잔치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부엌데기 너머로 들려오던 떡메 소리는 마을 전체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고, 고소한 강정 냄새는 온 마을을 하나의 거대한 부엌으로 만들어버렸다.

설날 아침이면 마을은 온통 사람 냄새로 북적였다. 질마재 사람들은 유난히도 개성이 강했고, 저마다 가슴 속에 시 한 편이나 전설 한 자락쯤은 품고 사는 듯했다. 미당의 시 속에 나오는 '문둥이'나 '소금 장수', '눈이 큰 각시' 같은 이들이 정말로 골목 어귀에서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단순히 가난한 농부가 아니라, 고단한 삶의 이면에 신화적 깊이를 간직한 수행자들 같았다.

기억 속의 'ㅇㅇ' 어르신은 명절만 되면 곰방대를 물고 마을 회관 앞을 지키고 서서, 타지로 나갔다 돌아오는 자식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분의 눈동자에는 질마재의 사계절과 서해의 밀물과 썰물이 다 들어있었다.

세배를 하러 가면 "질마재 기운을 받아야 사람이 된다"며 빳빳한 오백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시던 그 투박한 손마디를 기억한다. 그 손은 갯벌에서 삶을 일구고, 척박한 밭을 갈아 자식들을 키워낸 훈장 같았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는 교과서의 세련된 문장보다 더 묵직하게 가슴에 박혔고, 그 침묵은 겨울 산의 정적보다 깊었다. 그는 마을의 역사를 몸소 기억하는 살아있는 도서관이었으며, 그가 내뿜는 곰방대 연기는 질마재의 안개와 섞여 신비로운 기운을 자아냈다.

또 한 명 잊을 수 없는 이는 'ㅇㅇ'이라 불리던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마을의 온갖 대소사를 챙기며 설날 떡국을 끓일 때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했다. "이 집 떡국물이 좀 싱겁네! 고명은 좀 더 얹어야지. 그래야 복이 더 많이 들어온다." 하며 참견하던 그 목소리는 단순한 간섭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라는 단단한 밧줄로 우리를 묶어주던 노래였고, 서로의 허기를 채워주려는 따뜻한 연민이었다.

그녀는 누구네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어느 집 자식이 올해는 고향에 못 내려오는지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명절날 아침, 홀로 사는 노인에게 슬그머니 떡국 한 그릇을 놓아두고 가던 그녀의 뒷모습은 질마재 신화 속 자비로운 신의 현신(現身) 다름없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알면서도 모른 척 덮어주고, 명절만큼은 누구도 외롭지 않게 배려하던 그 넉넉함이 질마재의 진짜 힘이었다.

지금의 설날은 그때와 많이 다르다. 질마재의 그 많던 초가집은 자취를 감췄고, 시인의 노래가 되던 그 기이하고도 정겨운 인물들도 대부분 흙으로 돌아갔다. 마을 길은 말끔하게 포장되었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도시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세련되어졌지만, 가슴 한구석을 채우던 그 빽빽한 정서는 오히려 듬성듬성해진 느낌이다. 스마트폰의 알림음이 마을 회관의 스피커 소리를 대신하고, 명절의 풍경은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박제되어 버렸다.

하지만 명절이 다가와 눈발이 날릴 때면, 나는 여전히 그 고갯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 바람은 나에게 속삭인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너는 질마재의 아들이다"라고. 미당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했듯이, 나를 키운 건 질마재에서 꿋꿋하게 삶의 신화를 써 내려갔던 옛사람들의 강인한 눈빛이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결코 비루하지 않았고, 고단했지만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가치들은 이제 내 기억의 서고 속에 가장 빛나는 보석으로 박혀 있다.

사라진 것들은 슬픔을 남기지만, 동시에 그 슬픔은 우리가 돌아갈 마음의 고향을 만든다. 담벼락 밑에 쌓여 있던 장작더미의 구수한 냄새, 새벽녘 들려오던 절구질 소리, 그리고 갓 지어낸 복조리에 담긴 이웃의 투박한 축복들. 이런 것들이 사라진 시대에 살면서도 내가 여전히 삶의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의 뿌리가 질마재의 그 깊은 흙 속에, 그리고 그 흙을 일구던 사람들의 숨결 속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허기는 오직 그곳의 바람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올해 설에도 나는 질마재를 그리워할 것이다. 화려한 도시의 명절 음식과 백화점의 정갈한 선물 세트보다, 투박한 함박눈 아래서 커다란 가마솥에 끓여내던 그 진한 국물과 톡 쏘는 삭힌 김치 맛이 사무치게 그립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던, 서로의 상처를 따스하게 보듬던 그 뜨거웠던 눈길들이 그립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그 이름 뒤에 '누구네 집 자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던 그 시절의 호칭들이 그립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내 마음속엔 언제나 질마재로 향하는 길마가 얹어져 있다. 그 길마 위에 그리움을 한 짐 가득 싣고, 나는 오늘도 마음속 고갯마루를 넘는다. 그곳에선 여전히 옛사람들이 대문 앞까지 마중 나와 웃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느라 욕봤다, 어서 와서 뜨신 떡국 한 그릇 먹어라. 질마재 바람이 네 냄새를 맡고 벌써 마중을 나갔더구나." 하는 그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질마재의 바람이 내 뺨을 스친다. 이 바람은 단순히 차가운 공기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건너온 안부이자, 우리가 바쁘게 사느라 잊고 지냈던 근본에 대한 서늘한 일깨움이다. 이제 진짜 설이 오려나 보다. 내 마음의 질마재에도 다시금 하얀 눈이 내려앉아, 세상의 모든 어수선한 소음들을 덮어버리고 오직 그리운 이름들만을 불러내기 시작한다.

-작가 이동준 약력
포토하우스 카빙 교실 대표
국가공인 조리기능장
프랜차이즈 창업 컨설턴트
Sheraton Walker Hotel 16f*clock16) Carving(head cook) Biwon Hotel 14f skyloung Restaurant(head cook) Riverside Hotel Buffet(head cook)
카빙 데코레이션 지도자
과일 플래이팅 지도자
아이스카빙 데코레이션 지도자
포토그래퍼 사진작가
사) 한국프로사진협회 정회원
국민대학교 빛이랑 동아리 사진반 지도
고창뉴스 jcpark4747@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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